살아가는이야기

[스크랩]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

nagne109 2018. 1. 12. 19:45

구랍 23일~ 26일, 3박4일간 일본 나가사키(長崎)시에 거주하는 쿠사바 사토미(草場里見)씨의 초청을 받았다.
쿠사바 씨는 권영재 군의 수필과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해 주는 사람으로 나가사키 현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이다. 나는 권영재 군의 술상무 노릇하면서 그를 알게되어 지금까지 서로 왕래하고 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23일 22:30, 수속을 마친 여행객들을 실은 뉴카멜리아호는 출항하였다. 어렵게 구한 2층 침대에서 엔진 소리만
들릴뿐 파도가 잔잔하여 염려했던 배멀지는 하지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24일 05:30, 하카타(후쿠오카)항에 입항했으나 8시부터 입국수속이라 기다렸다. 일본은 외국인 방문객에게 지문
날인과 사진촬영을 의무화한 나라다. 범죄예방 차원이라지만 매번 입국시마다 이렇게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의 지문과 사진 등의 개인정보가 이미 저장되어 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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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중나온 쿠사바 씨와 함께 스낵코너에서 아침식사로 라면을 먹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승용차로 두시간 반
걸려 이곳 후쿠오카(福岡)에 왔다고 한다. 우리에게 원폭과 나비부인, 카스테라, 짬뽕, 군함도, 오우라 성당 등
으로 친숙한 나가사키현의 이모저모를 보여주겠단다. 오늘 일정은 나가사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가(佐賀)현
카라쓰(唐津)시에 위치한 나고야 성이다. 참고로 일본에는 두개의 나고야 성이 있다. 중부지방 나고야 시에
있는 일본 3대 명성 중의 하나인 나고야 성(名古屋:명고옥)과 사가현에 있는 나고야 성(名護屋:명호옥)으로,
발음이 같지만 漢字는 명고옥과 명호옥으로 분명히 차이가 있다.


도중에 니지노마쓰바라(무지개 송림)를 지나가게 되었다. 바닷가에 방풍림으로 심었다는데 규모가 길이 5km,
폭 400~700m에 소나무(곰솔)가 약 100만 그루, 차를 타고 끝없이 달렸다. 소나무를 거의 볼 수없는 일본 땅에
이렇게 많은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경이롭게까지 느꼈다.





이 나고야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한반도가 보이는 이곳을 거점으로 
일본 최대 규모의 성을 여러 장수들이 분담하여 5개월만에 쌓았다고 한다. 한때는 2만호가 넘는 가구가 살
정도로 번화하였으나 도요토미가 죽은 후 이 거대한 성은 버려져 황폐해졌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 코앞에다
 이렇게 큰 진지와 성을 만들며 전국의 군사 수십 만을 모으고 있었는데  조선은 뭘하고 있었을까.





천수각은 없어졌지만 이 성은 현해탄과 대마도를 바라보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조선침략 기지로
쓰였던 곳이다.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나고야 성에 130여 곳의 영주들을 집결 시켰다.
정유재란이 끝나는 시점까지 총 30만 명의 왜군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하며 오사카 성 다음으로 큰 성이었다.







보통 일본 성 하나를 축조하는데 4~7년 정도 걸린다는데, 5개월의 단기간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축조한
 까닭에 허술하고 모양도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낯익은 이름과 병력 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의 침략 본거지였던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며 아픈 마음을 안고 성터를 내려와 박물관에 들렀다.





나고야성 박물관 앞이다.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그 반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많은 자료를 상설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 돌하르방이 서 있고 중심부에 조선 수군의 자랑인 거북선과 일본 군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가라쓰(唐津)도자기나 이마리(伊万里)도자기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이밖에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이나 항일 의병, 안중근 의사 등의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다. 이곳의 명물이라는 오징어 요리로 식사를 하는데, 아무리 오징어가 비싸기로서니 안경만한
한치 두 마리를 내놓는다. 쿠사바 씨는 오징어와 한치를 구분할 줄 모른다. 권영재 군의 설명에 의하면, 漢字로
오징어를 오적어(烏賊魚)라 하는데 오징어가 까마귀를 잡아 먹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오징어가 죽은척 물 위에
떠 있으면 까마귀가 죽은 줄 알고 쪼면 그 까마귀를 감아가지고 물 속에 들어가 먹기에, 까마귀를 해치는 도적
이라 하여 오적(烏賊)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보건소의 지시라며, 요리를 외부로 가지고 가지 말아달라는  안내문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먹다 남은
음식은 집으로 가져가도록 권장(?) 하는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 일정을 접고 천천히 나가사키로 간다는 것이 쿠사바 씨의 운전
미숙으로 한참을 헤매다 해가 저문 뒤 나가시키에 도착하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거리는 조용한 편이었다.
일본의 유행가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처럼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나가사키 항에 있는
`나가사키항(長崎港)`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생선회랑 술을 시켜놓고 여독을 푸는 시간을 가졌다. 쿠사바 씨는  운전 때문에 알콜성분이 0%인 맥주를 마셨다.
쇼핑센터와 야경을 둘러보고 밤 9시경에 호텔로 돌아왔다.





25일 08:30,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쿠사바 씨의 승용차로 시마바라 성(島原 城), 운젠 후겐다케
(雲仙 普賢岳) 화산 피해마을에 가기로 했다. 운젠 지역은 화산으로 인해 흙이 진한 갈색이며, 감자 산지로 유명
하다고 한다. 비닐하우스와 케일처럼 생긴 특이한 작물도 많이 보였다.





시마바라 성에 도착하였다. 이 성은 1618년부터 7년에 걸쳐 축성되었으며 천주교 탄압의 중심지이기도했던 과거
 역사를 가지고 있다. 1층은 그리스도 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5층 천수각에서는 시마바라 시내는 물론
아리아케(有明) 바다와 아소산, 운젠 화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축성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노역과 세금
으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자 성모자상을 교묘하게 부처상들처럼 꾸며야 했고 모든 집기들도 불교 것 같지만 그 뒤엔
항상 십자가가 그려진 천주교인들의 물건들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상화와 성모자상을 밟고 가게 해 신자를 색출했던 후미에 그림, 최초의 일본 선교사인 자비에르,
저항하는 크리스천 농민들의 절규를 보면서 천주교 박해는 한일 양국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음을 알게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에도시대 초기에 일어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봉기로, 천주교인들이 일으켜 기리시탄의 난
또는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이라고도 한다. 혹사와 과중한 세금부담, 거기에 더해 기리스탄(가톨릭 신도) 박해와
기근에 의한 어려움까지 겹쳐 반발이 일어났다. 기리스탄 4만여 명이 주도한 이 반란에서 종교적 성격과 세금
착취로 야기된 생존권 문제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12만 명의 진압군에 의해 4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기리스탄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고 한다.





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도검전(刀劍展)을 관람했다. 당시 명성을 날린 많은 닛폰도(日本刀)가 전시되어 있었다.





시마바라 성 외곽을 둘러보며 옛 사무라들이 살았던 무가마을(武家屋敷)을 관람했다. 양쪽 가옥 가운데로
도랑물이 퍽 인상적이었고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이 양식을 얻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가서 구한 여러가지 재료를 넣어 끓인
구조니(具雜煮)라는 음식이 향토요리가 되었다기에 우리는 떡국처럼 생긴 이것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시마바라성 관광후 운젠 다케(雲仙岳)재해기념관에 도착했다. 1991년 폭발했던 운젠의 후겐다케 화산 재해의
참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는 화산피해의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근래 발생한 경주, 포항 지역에서의
지진을 겪은터라 관심있게 둘러보았다. 아래 사진의 큰 돌덩어리가 용암을 가공한 것이다.





1991년 운제화산을 대표하는 후겐다케(1359m)가 용암을 내뿜었다. 약 5년 동안 지속된 분화로 형성된 거대한
용암돔은 무너져 내렸고, 고온의 용암괴와 화산재, 화산가스가 합쳐진 화쇄류로 돌변해 시마바라 시를 덮쳤다.
44명이 숨졌고 2,200억엔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대참사였다. 이분화로 후겐다케 위로 헤에세이신잔(平成新山:
1483m)이 새롭게 솟았다. 영상자료실에서 분화 당시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다 생생한 기사 한 줄, 몇장의 시진을 찍기 위해 그들은 용암, 화쇄류와 목숨을 바꿨다. 세월호 선장이
속옷바람으로 저 혼자 탈출하는 것을 보면서 남의 기사를 뻬끼거나 사진을 공유하는 한국의 현실 앞에
우리는 목숨과 보도를 맞바꿀 수 있는 기자가 얼마나 될지...
44명 사망자 중, 주민 7명, 소방대원 12명, 경찰 2명, 화산연구자 3명, 보도관계자 20명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에는 자동차로 이동하여 화산폭발 후 피해를 입은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전신주가 묻히고
지붕 근처까지 밀려온 토석류가 무섭기도 하다.





당시 열풍에 의해 유리창과 건물 내부가 타버린 초등학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사진은 열풍에 피습된 오노코바(大野木場)소학교이다. 교실에서 뛰쳐나가는 학생과 대피시키는 선생도
보인다. 오른쪽 상단의 사진은 열풍에 새카맣게 타버린 은행나무가 이듬해 다시 잎이 돋아나 당시 주민들의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우리가 잘 모르는 화산의 무서움과 그러면서도 복구를 통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오늘 일정의 마지막인 운젠 온천지역 관람과 온천욕이다. 운젠(雲仙) 온천은 처음이기도 하고 이름이
멋있다는 생각에 기대가 컸다. 주차장 주변부터 강한 유황냄새와 자욱한 수증기가 마치 지옥을 연상시킨다.
여기는 오이토라는 여인이 불륜으로  남편을 죽이고 그 벌로 처형된 장소인 오이토지옥이다. 재미삼아 삶은
달걀을 사서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운젠 지옥을 한 바퀴 돌다보면 돌십자가를 만날 수 있다. 크리스천 순교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 절벽에서
뜨거운 물에 가톨릭 신자들의 몸을 거꾸로 담그면서 배교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것도 풍덩 집어넣어 죽도록
하지 않고 귀가 잘린 머리를 반쯤 넣었다가 꺼냈다가를 반복하며 온몸이 다 익혀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순교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옥 순례를 마치고 야외 온천장이 마련된 곳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나가사키로 돌아오는 도중에 시마바라 반도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지와(千千石)전망대라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름에 튀긴 감자를 사먹었다. 시마바라 반도의 단층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 중의 하나로
지질학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





지지와(千千石)전망대에서 본 시마바라 반도, 이곳이 소금온천으로 유명한 오바마(小浜) 마을이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이름이 같다하여 오바마를 상품화하고 그를 초청하지는 캠페인까지도 벌렸다고 한다.





권영재 군이 쿠사바 씨의 부인을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육류를 좋아한다는 부인을 위해 고기집에서
푸짐하게 먹고 즐겼다. 봄이 되면 부인과 둘째 아들의 대학 졸업기념으로 셋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한다.

 





쿠사바 씨가 답례로 커피숍으로 안내하였으며 부인으로부터 나가사키의 명물인 카스테라와 청주를 선물 받았다.
신이 난 권영재 군과 쿠사바 씨와의 팔씨름도 재미 있었다.



이튿날 아침 후쿠오카 행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준 쿠사바 씨, 버스에 화장실이 있어 편리했다. 사흘간
차를 타고 경치를 보면서 고속도로, 시골길, 시내도로를 거치면서 클랙션 소리 한번밖에 듣지 못한 교통질서,
첫날 잃어버린 줄 알았던 돋보기와 케이스가 삼일동안 그자리 그대로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일본과 일본인을
미워할 이유가 없음을 새삼 느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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