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약속일정을 정하며
여러분은 물론 이 의식을 알 것이다. 적절한 약속 시간을 정하는 의식.
한쪽은 부지런히 수첩을 넘기며 찾고, 다른 한쪽은 지나치게 큰 검지를 전자수첩의 지나치게 작은 키보드 위로 재빨리 움직인다. 한쪽이 약속시간을 제안하기가 무섭게, 다른쪽이 말한다. “잠깐, 안 돼, 그 시간은 좀 곤란해!” 한 사람이 괜찮으면 다른 사람이 난처하고, 그런식으로 오락가락 계속된다. 한쪽에서 이미약속이 ‘잡혀있다’고 말하면, 예의 바르게 무슨 약속이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게는 편리하다. 실제로 딴 약속이 없을 때라도 나는 종종 “벌써 약속이 잡혀있는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일정이 정말 약속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걸 보면, 나는 최후의 ‘보호구역’을 방어한다.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이 하얀 공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니까. 오로지 나만을 위한 영역. 그것을 다른 일정에 내주지 않으려고, 거기를 미리 빨간 줄을 그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두면, 옆에 앉은 친구가 그걸 슬쩍 훔쳐보는 경우에도 훨씬 낫다. 그러면 나는 “약속이 있네, 안 되겠어!”라며 능청을 떨고, 우리는 다시 열심히 달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전에는 그런 것이 양심에 거리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다. 난 다른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일만 있어도 “시간 없어요”를 외친다는 걸 알았고, 그럴 때면 나의 자유로운 보호구역도 최소한 그만큼은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둘을 똑같이 분배하기도 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일정표에 약간의 공란을 둔다면, 세상은 어쨌든 더 형편이 좋아질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다.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바쁜 사람이었고 19세가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에 항거해 싸웠고, 노예 해방을 지지해 투쟁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한때 문명을 떠나 자기가 손수 지은 숲 속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에서 은둔자로 2년을 산 적이 있다. 그는 해 뜰 때부터 해가 넘어갈 때까지 가문비나무와 호두나무사이 입구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새들의 노래와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서편 창으로 햇살이 떨어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아침인가 했는데, 보라, 벌써 저녁이 되었네. 기록해 둘 만한 거라곤 하나도 한 게 없다.“
원더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 기록해 둘 만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판인데, 기록할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소로우는 그저 거기 앉아서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밤중에 옥수수 자라듯 성장했다. 설사 내 손으로 그 어떤 일을 했다 한들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으리라. 그것은 나의 삶에서 떼어낸 시간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것을 위해 희생된 시간이었다.”
무언가 유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자극에 등을 떠밀리는 터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영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연습하고 있다. 이를 위해 따로 떼놓은 시간이 내 스케줄에 이미 예약되어 있다. “나의 삶에 널찍한 가장자리를 기꺼이 허락한다.”로 소로우는 말했다.
오늘날 이 가장자리는, 속도와 효율성이란 의무 아래 끊임없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만큼 중요하다. -그게 소로우의 생각이었다. “생명은 너무도 소중하다. 나는 진짜 참된 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또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에 이를 때 내가 전혀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구나 한탄하지 않기 위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오두막 집에서 은둔자처럼 살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 삶에 -그리고 내 스케줄 안에- 넉넉한 가장자리를 허락하려고 애쓴다. 내 일정이 꽉 차기 시작하면 나는 미리 “시간이 없네”라고 말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공란이 빈 채로 남아있게 만든다. 그건 나의 몫이니까. 그건 나에게 기록할 만한 가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가능성을 선사하니까. 단순할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아, 참, 한 마디만 더. 다음 번에 나랑 약속 시간을 잡게 될 때, 정말 내가 어떤 시간에 선약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런 체하는지를 묻지 말기 바란다. 난 정말 선약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안 된다.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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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길죠?
제말은 아니고요.....역시 최근에 읽은 책(신비주의자가 신발끈을 묶는방법)에서 옮겨왔습니다..
요즘, 저도 연습하는 걸 이 친구도 하고 있잖아요^^
그래 우리 함께 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