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회상
1946년 1월 9일생이니까 1950년 6월 25일에서 빼면 4년 5개월 16일이다. 그때의 기억이 남았는 것이지 아니면 내가 자라서 읽은 자료들을 상상해서 자기의 기억을 짜집기 한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생각나는대로 적어 보기로 한다.
인터넷에 뒤져보니 8월 3일에 왜관읍에 소개령이 내린것으로 되어 있다. 철교가 언제쯤 폭파되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 왜관에 있었으니 아마 엄청난 폭발음을 분명히 들었으리라. 철교가 폭파되고 오후에 강가에 나가니 성주쪽에서 탱크들이 다람쥐 재를 넘어 왜관쪽으로 오다가 강가에 있는 과수원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약목에서 왜관으로 오는 도로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군복을 입었는데 군인은 아닌 사람들이 기관총을 강가에 설치하고 인민군이 있는 쪽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박격포도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하여튼 10개 정도 기관총을 걸어 놓고 강 건너로 총을 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강건너에 있는 바위에 맞아 불꽃이 튀는 것이 보이다가 사격을 계속하니
강 한가운데 있는 모래벌에 총알이 떨어졌다. 북한군은 전혀 응사를 하지 않고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오르는게 지금 생각하니 아마 밥을 지었던 모양같다. 어머니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나무뒤에 숨어 이 광경을 보았다. 실탄을 있는대로 다 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 추럭을 타고 가버렸다. 우리도 추럭을 타고 피난을 갔는데 신동재를 넘었는지 아니면 다부원 쪽을 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팔달교에 들어서니 미군탱크가 다리밑에 일렬로 쪽 늘어서 있었다. 대구 피난 시절은 어느 동네인지 기억에 없고 비행기에서 뿌리는 삐라를 열심히 주워러다니던 기억 뿐이다.
위의 사진이 그때 내가 본 낙동강 인도교 모습이다. 일제 시대 경부선이 단선일 때 철교로 이용되다가 경부선이 복선이 되면서 철교위를 복개하여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다리다. 왜관 사람들은 인도교라 부른다. 원래 倭館 이란 곳이 일본사람들이 만든 곳이다. 철로가 지나가면서 일본사람들이 강가에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입주한 곳이다. 그 당시 철로는 약목에서 구미로 가지 않고 지금의 부상이란 곳을 통하여 김천으로 갔다. 지금의 국도 4호선이 그 당시 철로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얘기를 계속하면 피난 갔다 돌아오니 대부분의 집들이 불에 타고 없어졌다. 철교에도 탄환 흔적이 남고 터널 입구에는 총탄 자국이 빠곰빠곰했다. 강변으로 돌아다니면서 탄피를 줍고 실탄도 주었다. 실탄을 돌로 탁탁쳐서 화약을 모아 한 군데 모아 놓고 그 속에
실탄을 넣고 불을 부치면 실탄이 슝슝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내 건 위험한 놀이들을 많이 했다. 만년필 폭탄이 정말 있는건지? 산에 가서 만년필 주으면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아마 나이든 놈들이 만년필 자기들 할려고 만들어낸 말이 아니었을까? 어디서 났는지 대못을 구해서 땅바닥에 칼처럼 꽂기를 했다. 상대방 못 넘어뜨리기다. 잘못하여 자기 발등을 찍는 친구들들도 있었다. 자고산이라고 아군이 진지를 구축한 곳에 올라가면 군화가 하늘을 보고 있어 잡아 당기면 살은 썩어 없어져서 훌렁 벗겨지면서 뼈가 보였다. 강가 모래밭에서 조개를 잡다가 지뢰를 건드려 죽는 친구도 있었다. 한 친구는 철교 밑에서 주은 지뢰를 가지고 돌로 치다가 몸이 산산 조각이 나 시체도 찾지 못하였다. 매일 하는 것이 큰 아이들 따라다니며 전쟁놀이를 했다. " 양양 앞길을 바라 보면서 어깨에 총을 메고...."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많이 불렀다. " 동이 터는 새벽 꿈에 ;;;" 그리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신작로로 미군들이 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 갔다. 기차에도 탱크나 차를 싣고 지나 갔다. 미군들이 가끔 먹을 것을 던져 주면 우 몰려가서 서로 주으려고 쟁탈전을 벌렸다. 왜관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낙동강 철교를 지켰다 나는 흑인 병사 목위에 올라타고 모터보트로 낙동강을 오르내렸다. 모터보트 위에 서서 나를 어깨에 올려놓고 철교 있는 곳까지 자주 갔었다. 미군들은 심심하면 강으로 깡통을 던져 놓고 총으로 맞히는 놀이를 많이 했다. 우리집 앞에 있는 큰 버드나무에 단검을 하도 많이 던져 밑둥이 너덜너덜해졌다. 뒤에 들은 얘긴데 그 당시 미군들이 부녀자 겁탈을 하는 등 만행이 심해 신현확씨가 미군들을 모아 놓고 열변을 통해 미군들의 행패가 줄었다고 한다.
그 나이에 전쟁은 동화였다. 무서운 것도 없었고 배고픔만 없으면 매일매일이 신나는 놀이에 열중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전쟁이 끝나고 왜관 상이군인 폭동 사건이 있었는데 상이군인들이 순경을 붙잡아 강가에서 몽둥이와 의수(갈코리)로 때려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에 뒤져보니 왜관 상이군인 폭동에 대한 자료는 딱 하나만 보이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긴 찾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서장은 오포( 12시에 부는 싸이렌) 부는 돌탑이 있었는데 그 속에 숨어서 살았다. 어린 나이에 사람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정신외상이 심했을거라는 짐작이 간다. 그래서 내가 어지간한 일에는 겁이 없는건가? 그날 저녁 헌병들이 버스를 타고 와서 폭도들을 거의 다 잡고 일부는 약목으로 도망간 것으로 기억된다.
60년이 지난 그 강뚝위에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가 지난 6월 25일 저녁에 열렸다. 억울하게 죽은 수 많은 혼령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승과 저승이 있고 사후 세계가 있다면 지금 그들이 우리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박수를 칠까? 아니면 애통해할까? 6.25가 우리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걱정이 된다. 6.25의 비극을 실감나게 후세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